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단 편집) == 정의 == 거란 분파에 의해 세워진 [[동요(국가)|동요]]의 잔당이 중심이 된 이 세력은 [[1216년]](고종 3년)부터 [[1219년]](고종 6년)까지 고려의 북부 [[북계]], [[동계]]에서 중부 [[교주도]], [[서해도]], [[양광도]], [[경기]], 그리고 수도 [[개경]]까지 산발적으로 침공하고 끝내 격퇴되었다. 사실 이 3년간 빚어진 충돌은 역사적으로는 [[거란의 침입]]([[여요전쟁]]) 중 국사학계에서 그리 중시되는 주제가 아니며 1218~1219년 [[강동성 전투]]과 [[고려-몽골 전쟁]] 간의 전후사정으로 다루어지는 편이다. 이는 몽골과 고려의 1차 접촉이 이루어진 강동성 전투의 의의를 제외하면 거란, 여진의 이러한 침략이 고려로선 규모가 좀 더 커진 침입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 항목이 사용한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란 정의는 이러한 충돌전개와 강동성 전투의 제반상황을 지칭하기 위한 임시적이고 고식적인 명명일 뿐 그 제한을 벗어난 명칭이 아니다. 학계 일각에선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사료가 기술한 적성세력 거란병(契丹兵)을 '거란 유민' 혹은 '거란 유민군'으로 명명해 서술하려는 관점을 취했다. 이는 12세기 [[요나라]] 및 그 직계 [[서요]]등 주류 거란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들이 가진 동요 잔당의 성격을 명확히 하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그러나 개별 전투들의 각론에 집중된 소극적 양상이므로 사건 전말의 거시성이나 충돌 상황 전반을 아우르기엔 불충분하며 결정적으로 '''사료 원문에서 이들을 거란 유민이라고 단 한번도 지칭한 기록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거란 여적(餘賊)' 혹은 '거란 유종(遺種)의 침입(난)'이라 서술함으로써 거란의 잔당임을 강조하는 수식을 취한다. 이처럼 공식적이고 학계 일반론으로 합의되어 통용되는 명칭은 없으나, 1960년대 역사서의 경향은 이 충돌을 '''[[대요수국]]의 난'''으로 지칭했다. 각종 DB에서도 동요 잔당의 침공을 총론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할 시 대요수국이란 표제어로 접근치 않으면 전혀 무관한 기록이나 지엽적인 내용밖에 얻을 수 없다. 이렇듯 연표에선 각주나 부연없이 거란 유민 침략 자체는 간략하게 다룰 뿐이나 [[여몽전쟁]] 전 [[여몽관계|고려와 몽골이 접촉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기에 [[강동성 전투]]는 어디서나 반드시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